“정보를 켜다, 소통을 잇다” “지식과 사람을 ON하다” “당신의 커뮤니티, 커넥트온”
오래전 오늘
2026-04-14

[오래전 오늘] 2026-04-14

8

오래전 오늘 인포그래픽

4월 14일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임진왜란의 비극적 서막부터 민족의 분단을 막으려 했던 지도자들의 결단, 그리고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함성까지 관통하는 상징적인 날입니다. 역사 해설가로서 오늘 이 날에 새겨진 주요 사건들을 정리해 드립니다.
1. 임진왜란의 시작, 부산진 전투 (1592년 음력 4월 14일)
📝 사건 설명
1592년(선조 25년) 음력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인 4월 14일 아침,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부산진성을 공격하며 7년간의 참혹한 전쟁인 임진왜란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당시 부산진 첨사였던 정발 장군은 압도적인 병력 차이(조선군 약 800명 vs 일본군 약 18, 700명)에도 불구하고 성민들과 함께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정발 장군은 성이 함락되는 순간까지 갑옷도 입지 못한 채 적의 탄환에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으며, 이 전투는 비록 패배로 끝났으나 조선의 항전 의지를 보여준 첫 번째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 관련 영상 보기 (HTML Tag & Link)
HTML
👉 여기를 클릭하여 관련 영상 보기 ([조선변란사] 정발이 장렬하게 전사한 임진왜란의 첫 전투, 부산진 전투)
정발이 장렬하게 전사한 부산진 전투
2.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결의 표명 (1948년 4월 14일)
📝 사건 설명
1948년 4월 14일,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거목인 백범 김구와 우사 김규식은 공동 성명을 통해 평양에서 열릴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했습니다.
당시 남한만의 단독 선거(5.10 총선거)가 확정되자, 두 지도자는 민족의 영구 분단을 막기 위해 북한 지도자들과 직접 대화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들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안일을 위해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북행을 준비했습니다. 이는 통일 정부 수립을 향한 마지막 평화적 시도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닙니다.
📺 관련 영상 보기 (HTML Tag & Link)
HTML
👉 여기를 클릭하여 관련 영상 보기 (역덕이슈오늘 I 59 백범 김구, 38선을 넘다)
백범 김구, 분단을 막기 위한 마지막 발걸음
3. 4.19 혁명의 도화선, 마산 시위의 확산 (1960년 4월 14일)
📝 사건 설명
1960년 4월 14일은 훗날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이 전국적으로 폭발하기 직전의 긴박한 전야였습니다.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마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습니다.
4월 14일에 이르러 마산 시민들의 투쟁은 더욱 조직화되었고, 서울을 비롯한 부산, 전주 등 전국 각지의 학생들은 "부정선거를 다시 하라", "민주주의를 되찾자"는 구호 아래 시위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날의 긴장감은 결국 며칠 뒤인 4월 19일,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거대한 분기점이 되는 전민족적 혁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 관련 영상 보기 (HTML Tag & Link)
HTML
👉 여기를 클릭하여 관련 영상 보기 (문화유산 코리아 -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4.19혁명)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 4.19 혁명
위 영상은 4.19 혁명의 배경이 된 3.15 의거와 마산 시위 현장의 기록을 통해 당시 시민들이 갈망했던 민주주의의 가치를 잘 보여주고 있어 선정했습니다.
YouTube
역덕이슈오늘 I 59 백범 김구, 38선을 넘다 - YouTube
역덕이슈오늘 I 59 백범 김구, 38선을 넘다 - YouTube
KBS 히스토리
새 창에서 열기
1948년 4월 19일 백범 김구가 방북을 결행, 38선을 넘습니다. 민족의 분단을 막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김구는 같은 해 2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남북한 정치지도자 회담을 제안했습니다. ‘읍고함’은 울면서 고(告)한다는 뜻입니다.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독립운동가의 피 끓는 심정이 녹아 있습니다.

“......독립이 원칙인 이상, 그것이 당장엔 가망 없다고 해서 자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은 왜정 하에서 온 민족이 뼈저리게 인식한 바 있거니와, 지금 독립정부의 수립이 당장에 가망 없다고 해서 단독정부를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조국이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이 한 목숨 통일 제단에 바치겠노라. 나는 통일 정부를 세우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위를 위해서 단독정부를 세우는 일에는 가담하지 않겠노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에서 인용

해방 후, 38선을 기점으로 북한은 소련군이 남한은 미군이 분할점령하고 있었습니다. 한반도 정부수립과 신탁통치 방식을 결정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한반도 문제는 유엔(UN)으로 이관됩니다. 1947년 11월 17일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 총선거로 통일정부 수립을 결의합니다. 선거를 감독하기 위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파견되지만 북한과 소련은 유엔의 결정에 반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했습니다. 유엔은 다시 소총회를 열고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합니다. 즉, 남한에서의 총선거를 통해 정부수립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김구는 단독선거가 민족의 분단으로 이어지고, 민족상잔의 비극을 초해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습니다.
1948년 4월 19일 평양을 방문한 김구와 김규식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에 참여하고 공동성명서를 채택합니다. 4월 30일 발표된 공동성명서에는 외국군 철수, 외국군 철수 후 내전 없음, 보통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남한 단독선거 반대가 명기됐습니다.
방북을 마치고 돌아온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최초의 통일운동단체인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합니다. 분단을 막기 위한 김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정부가 수립됩니다. 1949년 6월 29일 김구는 안두희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합니다.

#근현대
새 창에서 열기
[조선변란사] 정발이 장렬하게 전사한 임진왜란의 첫 전투, 부산진 전투(釜山鎮戰鬪) - YouTube
문역뜰
새 창에서 열기
#조선변란사 #정발 #임진왜란 #부산진전투 #고니시_유키나가 #선조 #송상현 #가은산
조선변란사
정발이 장렬하게 전사한 임진왜란의 첫 전투
부산진 전투(釜山鎮戰鬪)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침략을 감행하였으며 고니시 유키나가는 대장으로 쓰시마 섬 이즈하라에서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함께 700여척의 전선과 18, 700명의 병력을 끌고 부산 절영도(絶影島)에 상륙했습니다.
일본군의 병력 구성은 고니시가 이끄는 7, 000 명과 그를 따르는 장수 소 요시토시 5, 000 명, 마츠우라 시게노부 3, 000 명, 아리마 하루노부 1, 000 명, 고토 스미하루 700 명이었습니다.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은 1592년 3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길을 빌려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건네는 것을 보고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껴 절영도에서 군사 훈련을 겸한 사냥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13일 대마도 쪽에서 대규모 선단이 접근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으나 이를 세견선으로 여기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3일 임인 1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왜구가 쳐들어와, 동래 부사 송상현 등이 죽다

(전략)
적선(賊船)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은 마침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발(撥)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
이튿날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고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죽었으며, 그의 첩(妾)도 죽었다.
(후략)
새 창에서 열기
문화유산 코리아 -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4.19혁명 - YouTube
EBSDocumentary (EBS 다큐)
새 창에서 열기
문화유산 코리아 -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4.19혁명

공식 홈페이지 : http://home.ebs.co.kr/culturekorea/mainrn

오랜 세월 동안 돌은 인간에게 신앙의 대상이었다. 큰 바위나 앞에서 제사를 올리며 안녕을 빌었다. 삶이 거칠고 험했기에 그 마음은 더욱 절실했다. 돌을 찾아가는 여행길에서 시작한다.

세계유산의 역사적 문화적 예술적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문화유산 코리아를 통해

우리나라의 세계유산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높이고 세계유산의 우수성을 알리는 기회의 장을 마련한다.
새 창에서 열기

8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